“살고 나면 또 배울 것이 있더라”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저를 이 인터뷰 코너에 초청한 이유가 뭐죠?” 조은 교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인터뷰 대상 가운데 여성이 한 분인가 밖에 없는 것 같던데…. 제 쪽에서 그걸 먼저 묻고 싶네요.”(웃음)
뜨끔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대한민국 평생교육사의 대부분이 여성이고, 웹진 <다들>의 편집진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창간 1년이 넘도록 멘토 인터뷰 코너에 여성이 한 분 밖에 없었다. 송년호를 맞아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는 ‘여성계 원로’를 찾기로 한 뒤 조은 교수를 초대한 건 그런 까닭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와 비슷한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다. 아, 그것이었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정치와 경제, 여성, 교육 등 우리 사회 7개 분야의 중견, 중진 인사 7명을 인터뷰한 책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을 펴냈다. 여성 분야에서는 조은 교수를 인터뷰했는데, 그 인터뷰도 조 교수가 “왜 하필이면 나냐?”라고 묻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백 교수의 답변을 소개하는 것으로 <다들>의 답변을 대신하자. “여성 분야라는 게 그 안에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분석이나 대응책이 있고, 여성운동도 있고, 또 여성학·여성주의 담론도 있어요. 굉장히 광범위하지요. 또 그 하위 분야들 안에도 갈래가 많고요. 독자들이 이 분야를 포괄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조 교수를 인터뷰하는 일은 한 사람의 생애사를 채록하는 일과 비슷했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그 안에서 한국 사회의 계급, 젠더, 정치 문제 등이 씨줄날줄로 교차했다. 이는 그가 가난한 집안의 25년을 따라가며 썼던 <사당동 더하기25>라는 책의 서술 방식과 비슷하다.
인터뷰 초반부터 ‘조은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작정했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신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신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미국으로 가 사회학으로 박사를 했는데요. 전공을 계속 바꾸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우스갯 소리로 가장 인기 좋은 과에서 점점 인기 없는 과로 전공을 바꿔왔다고 이야기를 해 왔는데, 사실은 그 반대예요. 그때는 여학생이 영문과 나오면 교직으로 가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사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교생실습도 안 했거든요. 그래서 대학 졸업하고는 바로 선명회(현 월드비전)에 입사했습니다. 해외 후원자와 후원 받는 고아들 사이에 편지가 오가는데, 그 편지 번역하는 일을 했지요. 국제기구라 토요일에 쉬는 데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만 일하고 월급도 많아 모두들 선호하는 직장이었어요. 그 당시 말로 ‘규수 직장’, 여자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지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 직원들이 많았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품위있게 옷 입은 중년 부인들이 들어와 죽 둘러보고 가요. 왜? 며느리 될 여자들 선보러.
그런데 저는 일이 재미없더라구요. 그래서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동화통신(현 연합통신)에 외신 기자로 입사해 2년 정도 일했습니다. 통신사는 대학원 다니기 좋은 직장이에요. 학비도 지원해주고, 특히 외신부는 아침 6시 반에 일을 시작해 오전 9시면 끝났거든요. 그래서 동화통신에 다니던 1971년, 신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겁니다.
언론의 자유로움이 좋더라구요. 그 직장에서 부장님께 정확하고 깨끗한 영어를 배우기도 했고요, 고은 시인, 서기원 소설가 등이 당시 그 직장에서 일을 했었지요.
그러니까 기자로 일하다가 학문적인 필요성을 느껴서 언론 관련 석사를 하신 거군요?
아, 그게 아니고요, 영문과에 들어갈 때는 영문과 교수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당시 대학 영문과란 이중의 허영을 상징했습니다. 각 지역 고교 수석들이 가는 데라 한편으로는 수재 여성이라는 걸 입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남성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과였어요. 법대나 의대와 달리.
그런데 들어와 보니 서울대 영문과에 김우창, 백낙청 교수님이 계시는 거예요. 집안도 좋고, 하버드 나오고, 나이도 젊고 세련된 그 분들을 보며 “저 정도는 돼야 교수지, 우리가 교수를 어떻게 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도 과 대표가 백낙청 교수님을 처음 보고 와서 했던 일성을 잊지 못합니다. “돈 많이 들인 살이더라”.(웃음) 쇠고기와 우유만 먹은 하얀 살이라는 거죠. 몸에 바로 계급성이 나타난다는 겁니다.(웃음). 그 젊은 교수들이 우리로 하여금 손을 들게 만들었지만,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두고 두고 그 분들이 레퍼런스로 인용되고, 비교점으로 작용했어요. 생각해 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건 좋은 선생님을 끊임없이 만났다는 겁니다.
조은 교수를 처음 본 건 1990년대 중·후반이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추진본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한겨레신문사는 공동육아연구회와 함께 ‘남북어린이어깨동무’라는 대북 지원 단체를 만들어 북녘 어린이에게 식품과 영양제, 기초 약품을 보내주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공동육아연구회의 조형 회장(이화여대 명예 교수)이 어느 날 조 교수를 동지처럼 대동해 나타났고, 첫 눈에 그가 ‘또 하나의 문화’로 우리 사회 여성운동에 새로운 흐름을 만든 네 명의 ‘조’(조형, 조은, 조한혜정, 조옥라)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당시 조 교수는 앳된 얼굴에 맑은 웃음을 머금고 조용조용 얘기를 이어가는 20대 중반의 대학원생 모습이었다. 속으로 “아니 어쩌면 나이가 들어도 모든 게 저렇게 소녀 같을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물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20여년 만에 다시 보는 그는 세월을 어디로 다 흘려보냈는지,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표정과 차림새에서 여전히 풋풋한 젊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쯤에서 조 선생님에게 ‘내 인생의 선생님’은 누구였는지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초등학교 때는 세 분의 선생님이 계셨어요. 2학년 때 윤복림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신 분인데,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정말 어수선할 때예요. 과외라는 개념도 없던 그 때, 선생님이 정말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어요. 초등학교 2학년을 데리고 수예를 가르쳐주시기도 하구요. 제가 지금도 시간이 나면 헌 옷에 수를 놓거나 땜질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 좋은 버릇(웃음)도 순전히 윤 선생님 덕분이예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은 그림을, 5~6학년 때 담임은 서예를 가르쳐주셨지요. 이 분들이 과외비도 안 받고, 아무런 보상 없이, 정성껏 가르쳐 주신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6개의 특기상을 받았는데, 그게 다 그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신 결과였어요. 서예, 그림, 웅변 등.
중·고등학교 때도 서울대 영문과,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선생님들이 계셨지요, 그 분들이 저에게 너는 충분히 서울대 영문과 갈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이 박경리 작가와 같이 등단한 이수복 시인이었고, 음악 선생님의 남편은 김현승 시인이었어요. 심지어 제 아들이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했는데 1타 강사가 저의 고교 수학 선생님이었어요. 그렇게 좋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대학에 들어왔더니 김우창, 백낙청 교수님이 같은 기라성 같은 분들을 또 만나게 된 것이지요. 사실 ‘기라성 같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들이지요.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학생의 평준화’보다 더 중요한 게 ‘조건의 평준화’예요. 학교 조건을 얼마나 잘 해주는가, 얼마나 좋은 교사들을 배치하는가, 이런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다행히 당시에는 지방의 조그만 학교에도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결국 동화통신을 그만두게 되지요?
결혼하면서 그만뒀어요. 당시엔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둬야 했으니까. 은행도,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저희는 그걸 숙명처럼 받아들였지, 저항할 생각도 못하는 세대였습니다. 결혼하기 전인 1971년에 신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결혼하고 출산을 하고, 서울대 전임이던 남편 따라 74년에 미국으로 갔어요. 당시엔 부부가 같이 나가지도 못하고 남편이 나가고 6개월 뒤에 배우자가 따라갈 수 있었어요. 저는 출산을 하고 애를 친정에 맡기고 갔습니다. 나도 가서 공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때는 서울대 교수 한달치 월급을 다 바꿔도 비행기삯이 안 나왔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학금이 끊겼어요. 남편이 록펠러재단의 세미 장학금을 받고 갔는데, 전공을 의료에서 공공의료로 바꾸자 장학금이 끊어진 거지요.
그래서 제가 동아일보 LA지사 미주판 기자로 일하며 남편을 뒷바라지 하게 됐지요. 완전히 ‘유학생 와이프’가 된 겁니다. 일을 하면서 유학생 와이프보다는 내가 유학생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구요.
1974년에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서 신문대학원에 복학을 하고, 이듬해에 해외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요. 학비와 비행기삯이 함께 지급되는 장학금이라 1976년에 홀로 유학을 떠났지요 그때부터 제가 좀 더 독립적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이는 없었나요?
아이는 친정 어머니가 봐주셨어요. 결혼한 뒤 살림하는 게 즐겁지 않았고, 결혼 생활이 제게 안 맞는 옷 같다는 느낌이 늘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한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고요. 그래서인지 선선히 “내가 애 볼테니 너는 가서 공부해라”, 그러시더군요.
유학 가면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당시 우리 나라에서 사회학이란 사회주의 이념과 짝지어 가는 분위기라 학부 신설 인가가 안 나올 정도였지요. 제가 동국대 교수가 될 때까지도 동국대는 ‘사회학과’가 아니라 ‘사회개발학과’였어요. 주변 사람들이 영문학 했으면 선후배도 많겠다, 자리 잡기 쉬울텐데 왜 자리 잡기도 힘든 사회학을 선택하냐고 말리기도 했고요.
왜 사회학이었습니까?
사람은 자기 삶의 방향이나 전공을 뚜렷하게 정해서 움직이는 경우보다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만약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유학했으면 공부를 끝내지 못했을 거예요.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이겨내야 할 조건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뚜렷한 목표가 아니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운동화 신고 도서관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학 온 거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또 하나, 제 앞에 결혼한 선배가 장학금을 받고 온 적이 있는데, 아이도 있고 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갔어요. 만약 나까지 그러게 되면 결혼한 여자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겠다 싶어 선례를 만들려고 끝까지 한 것도 있지요.
요즘 학생들이 전공에 목을 매는데, 학부는 자유롭게 하고, 전공은 살아가면서 정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예요. ‘목표를 뚜렷이 하라’가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조 교수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6년간 유학을 했다. 박사 논문은 ‘한국 도시에서 기혼 여성의 고용과 소득(Class differences in maried woman’s earning in urba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미혼 여성과 조건 나쁜 기혼 여성은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교육 받은 여성은 고용률이 오히려 더 낮았던 한국의 현실을 분석한 논문이다. 그 논문에 이미 조교수의 계급과 가정과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타나 있었던 셈이다.
지난 2015년, 민주당에서 선출직평가위원장, 말하자면 공천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셨지요? 현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직을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소에 “나는 5mm도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 2011년에도 당시 야당의 공천심사 위원을 했어요. 마침 <사당동 더하기 25>의 원고를 넘긴 바로 다음 날, 정년퇴직 준비로 짐을 싸고 있었는데 공천심사위원을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만약 그런 때가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거예요.
공천 심사를 하면서 빠른 시간에, 아주 집중적으로, 한국의 정치판을 들여다 볼 수 있었지요. 두 달 동안 아침 9시부터 어떤 때는 밤 11시까지 서류를 들여다봤는데, 내가 현실 정치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서 죄 받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웃음) 그리고 내가 호남 출신(전남 영광)이면서도 호남인의 정치적 정서를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공천심사위원회 사무실 집기를 사려고 백화점 대신 남대문 시장에 가보게 됐는데, 시장 골목의 행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호남 사람들이거든요. 이 분들이 바로 호남 민심을 대변하고 정치적인 기초가 되는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우리가 농담으로 한국 사회 3대 마피아가 호남 향우회, 고대 동문회, 해병대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서야 실감했지요.
19대 공천심사 경험 덕분에 작년 선출직평가위원장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때도 마침 어떤 원고의 초고를 끝내고 조금 쉬어야지 할 때 전화가 왔어요. 아마 제가 정치적으로 친소관계가 없어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위원장 받아들이고 말이 많았는데, 제가 조건을 3개 내걸었어요. ① 평가위원 전원의 구성을 내가 하겠다. ②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 ③ 어떤 결과에도 승복해라. 그 덕분에 아무 방해 없이 일 할 수 있었습니다. 일 하는 동안 전화 한통 받은 게 없었으니까요. 평가하는 일은 교수가 항상 했던 일이고, 사심이 없었으니까 제대로 할 수 있었지요. 저는 개인 정치인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강한 야당에는 관심이 많아요.
<사당동 더하기 25>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큐가 먼저 나왔지요? 다큐 <사당동 더하기 22>를 같이 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영화하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다큐를 찍기 2~3년 전 제가 동국대에 영상사회학을 개설했어요. 서울대 다음으로 저희 학교가 개설했는데, 동국대는 영화학과도 있으니까 조인트를 한 것이지요. 처음엔 반대도 많았어요. 실증주의 사회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검증과 증명, 통계 등이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저는 인터뷰, 생애사 등 질적 방법을 강의했고, 영상사회학까지 개설했으니까요. 저는 학문에서 주제도 중요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쓰는가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쓰기(Writing)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인쇄 매체만 글쓰기가 아니라 영상도 쓰기의 일종이라는 생각입니다.
동영상은 원래 수업용으로 만들었어요. 20년 지나면 우리 학생들이 산동네라는 개념을 잘 모르겠구나 싶어서 만든 겁니다. 제가 처음 수업할 때는 “사당동에선 칼잠을 자더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몰랐냐는 표정을 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20년 지나고 요즘 이야기해보면 그런 건 아무도 몰라요.
다큐는 촬영에 관심 있는 사회학과 학생들이 있어서 함께 했어요. 처음 촬영했던 친구(김만재)는 찍고 6~8개월 만에 MBC에 입사해 나중에 <아마존의 눈물>을 만들었구요. 두 번째 촬영자(조원열)는 언론학과 학생이었는데, 나중에 <괴물>의 조감독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촬영자(구재모)는 공주영상대학 교수가 되었구요. 마지막 촬영자 박경태는 <나와 부엉이>라는 작품을 전주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지요.
촬영했던 친구들이 다 잘 되었네요?
교수가 학생을 키워가는 그런 방식으로 했으니까요. 다만 촬영자들은 학생이었지만 편집은 프로가 했어요. <플란다스의 개>로 편집상을 받았고, 임상수 감독과 같이 일하는 전문가 분이었지요.
동국대에서 제 마지막 강의는 ‘사회학은 현장이다’였어요. 흔히들 <사당동 더하기 25>를 25년 간이나 같은 가족을 지켜봤다는 시간의 개념으로 다루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급을 넘어서는 공부였어요.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것과는 다르게 계급을 넘어 공부한다는 것이 뭔가를 배웠어요. 제가 편견이 없고 교육적이고 학자로서 포지션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삶의 계급이 다른 사람들을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학자로서의 편향과 오만을 알게 됐어요. 그걸 넘어서는 게 무척 중요하죠.
사당동 연구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빈민가 출신의 사회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질문하게 되고, 계급을 넘어서는 연구자는 어떻게 가능할까를 수시로 묻게 되었지요.
하하, 그러고 보니 사당동이 조은의 평생교육의 장이었군요. 젊은 시절 소설도 쓰신 걸로 아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인문학이란 무엇입니까?
인문학 교육은 한 사회의 감수성을 확장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 축적보다 감수성 확장이 필요한 거지요. 감수성이 확장되지 않으면 책의 독해력도 떨어집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감수성 교육을 잘 받은 경우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내내 나의 예민함(Hyper sensetive)를 감춰야 한다고 배웠고 늘 감성이 억눌려 있었지요. 그게 억울합니다. 지금 많은 예민한 학생들도 그럴 거예요. 우리 사회가 합리성, 양반의식 같은 것들을 계속 가르쳤는데 그게 감수성을 억압하는 괴물인 것이지요.
1946년생이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한국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어릴 적 전쟁의 경험은 이후 성장 과정에서도 특별히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한국전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뭐갈까요,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랄까요, 그런 계기였어요. 서울에 살 때 전쟁이 터졌는데, 바로 호남 시골의 외가로 피난을 갔지요. 피난 간 곳이 문화 유씨하고 하동 정씨가 모여 사는 대성부락이란 곳인데, 저는 거기서 ‘조씨’라는 다른 성을 가진 ‘뉘집 외손녀’라고 불려졌어요. 아웃사이더로서의 원초적 경험이었습니다. 그 뒤 초등학교 가서는 ‘외자 이름’을 가진 ‘여자애’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구요. 그때만해도 외자 이름이 흔치 않았거든요. 대학 들어와서는 지방, 그것도 전라도에서 유학온 여학생 처지가 아웃사이더였지요.
‘현장 사회학의 대가’로 평가 받고 계신데, 최근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어 매번 참가합니다. 분노를 가져야만 합리적인 저항력이 생긴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분노가 쌓였었는데 그걸 분출할 수 없어 ‘헬조선’이라는 좌절이 왔잖아요? 세월호는 뭐 더 말할 수도 없구요. 그런데 촛불집회를 통해 드디어 분노를 합리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예요. 자기가 옳고, 그걸 분노로 분출해서 이기는 경험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 국민은 한국 전쟁 이후 승리의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물론 1987년 6월항쟁이 있긴 했지만, 승리할 만하면 좌익, 빨갱이로 은폐시켰지요. 그런데 이번엔 좌빨이(웃음) 숫적으로 너무 많아 어떻게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비합리적인 이념공세로 덮어왔던 것을 다수가 “아니다”라고 동의하고, 빨갱이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이렇게 멋지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90년대 제가 근무하는 동국대에서 성추행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집 애가 “엄마는 뭐 그런 일로 분노하고 그래?”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엄마는 분노할 일에 분노할 수 있을 때까지 살겠다”고 대답했어요. 내가 분노할 수 있을 때 분노도 못하면 그건 죽은 거잖아요?
촛불집회 후 사람들한테 활력이 생겼어요. 세계적인 락페(락페스티벌)보다 더 멋져요. 이런 걸 보고 큰 어린 애들에게는 엄청난 자산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뇌리에 남고 가슴에 사무치는 가르침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요, 아흔 넘은 어머니는 늘 “살고 나면 또 배울 것이 있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결국 삶에서 배운다는 얘기지요.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산 것도 같고, 안 산 것도 같다”고 하셨어요. 30대 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여든 넘게 사셨으면서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이 말씀이 너무 이해가 가요. 텍스트의 해석력이라는 것은 삶의 역량 만큼 가는 것이지요. 저는 평생학습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삶에서 오는 독해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은 교수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내자동 골목에서 사진을 함께 찍었다.
왼쪽부터 신다영 주임, 이유정 작가, 조은 교수, 김영철 원장, 김혜영 팀장
정리/김영철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원장, 이유정 <다들> 작가
출처 -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 평생교육 전문 웹진 다들 http://smile.seoul.kr/webzine?post_id=16371&term_id=780
''사회학'에 대하여 > role mod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겨례]사회학은 ‘지금’ ‘여기’ 삶의 문제를 묻는 것 - 바우만교수 (0) | 2018.08.23 |
---|---|
[한겨례]김영미 분쟁전문 피디 “징글징글하지만, 저널리스트잖아요” (0) | 2018.05.28 |
[나눔문화]김예슬 고려대 자퇴, 대학거부 선언문-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0) | 2018.03.24 |
사회역학자 김승섭교수 - 노동자의 잘린손가락, 사회역학자의 길 가게 해 (0) | 2018.03.01 |
‘사회의사’의 길 선택한 김승섭 고려대 부교수 (0) | 2018.03.01 |
1946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광주 수피아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학과 졸업 뒤 서울대 신문학과 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와이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3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로 강단에 선 뒤 2012년까지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현재는 동국대 명예 교수이다.
오랫 동안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 왔다. 1986년부터 25년 동안 사당동 판자촌의 한 빈곤 가족을 4세대에 걸쳐 연구한 뒤 연구 결과를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 냈다.
또하나의 문화 이사장과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장,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사당동 더하기 25> 외에 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과 <절반의 경험, 절반의 목소리>, <도시 빈민의 삶과 공간>(공저), <성 해방과 성 정치>(공저) 등이 있다. 사당동 판차촌 가족 연구 과정을 영상에 담은 <사당동 더하기 22>를 제작하기도 했다.